피아노 앞에 앉았다. 백만 년 만에 지구로 돌아온 우주인이 된 기분이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다. 나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그동안 왜 피아노를 안 쳤나? 어쩐지 자꾸만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죄책감마저 들었다. 돈 많고 성공해서 큰 집에 살아야만 피아노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닌데도 자꾸만 나도 모르게 분에 넘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비좁은 고시원 방에 88건반 악기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고 예단하고 있었다. 그러다 쇼핑몰에서 디지털 피아노를 봤고 규격 수치가 나와 있었다. 다이소에 가서 천 원짜리 삼 미터 줄자를 사다가 빈 공간의 가로 세로 길이를 재보니까 딱 맞는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 이것이 지난 일요일(2015.10.25)에 생긴 일이다.

오늘(2015.10.27) 오후에 디지털 피아노 카시오 CDP-120이 도착했다. 함께 온 거미다리 받침대 설치하고 그 위에 피아노를 놓았다. 미리 줄자로 재어놓았지만 과연 이게 제대로 들어갈지는 불안했다. 설치해 놓으니까 정말 딱 맞는다. 어쩜 이럴 일이 다 있다니.

 

설치나 사용은 익숙해서 설명서를 볼 필요가 없었다. 카시오 CDP-100을 써 봤기 때문이다.

악보 안 보고 완벽하게 칠 수 있었던 바흐 평균율 1권 C장조 전주곡은 이제 악보를 보고 떠듬거려야 겨우 간신히 다 쳐낼까 말까다. 악보 읽기가 미숙한 탓이다. 계이름 연필로 악보에 적어서 무조건 반복 연습해서 손가락이 기억하게 했었다. 지금은 손가락이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알프레드 성인용 레슨교재를 구입해 놓았다. 기초부터 다시 제대로 쌓아올려야 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이다.

2015.10.27

Posted by 러브굿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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